탈인상주의라고도 불리는 후기 인상주의는 1880년대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나왔던 프랑스가 중심인 미술 작품들을 아우르는 매우 광범위한 개념의 용어이다.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에서 시작했지만, 그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 세계를 확립하려고 한 예술 사조이다.
이 움직임의 가장 중요한 화가들로는 고흐, 고갱, 세잔을 들 수 있다.
후기인상주의라는 용어는 영국의 예술비평가 로저 프라이가 프랑스의 새로운 미술을 영국에 소개하기 위해 기획한 전시회 <마네와 탈인상주의자들, 1910~1911>이라는 전시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라이는 이 전시를 기획하면서 ‘인상주의자’라는 명칭을 제안했으나, 참여 화가들의 반대로 ‘탈인상주의자’라는 이름을 확정했다. 이 전시는 로저 프라이가 마네와 더불어 이들의 작품을 전시했던 이유는 이들이 전통의 어떤 부분을 취하고 어떤 부분을 버렸는지 관객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후기인상주의는 공통의 예술적 목적, 목표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자신의 관점을 추구하기 위해서 전통으로부터 탈피했듯이 후기인상주의자들은 마네의 본을 따랐다. 이는 일본 미술의 대담한 단순화를 위해 입체감이나 다른 세세한 것들을 희생시켜 더욱더 강렬한 화법을 구사할 수 있다는 일본 화풍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자연의 순간적인 인상에 집착하는 인상주의의 특징을 거부, 원시적인 소재와 강렬한 색채의 도입으로 20세기 미술의 선구가 되었다. 또한 디자인과 구조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형태에 초점을 맞추면서 미술의 상징적, 정신적, 감정적 의미를 다시금 일깨웠다.
미술사상 대전환의 시발점을 일으킨 후기인상주의 대표작가들은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이 있다.
피카소는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라면 세잔은 모든 이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세잔은 '자연으로부터 푸생'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하였으며 웅대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를 지닌 미술을 자신의 예술적 목표로 삼았다. 색채와 입체감의 묘사에서 오는 새로운 발견들을 높이 샀으며 자신의 인상에 따라 자기가 본 그대로 형태와 색채를 그리고자 했다. 또한 그는 균형 잡힌 화면 구성에도 관심이 있었다. 아카데미의 전통적 원근법의 눈속임을 의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견고함, 깊이감을 전해주고자 전통적 소묘 방법이 아니더라도 과감하게 구도를 독창적이게 구성하였다. 정물들의 사실적 묘사하는 데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공간과 입체감을 분석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정물을 그릴 때 형태와 색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자신의 특수한 실험에 필요할 때만 정확한 원근법을 포기했는데 미술의 전통적인 공간적 관례를 타파한 그의 접근법은 미술사상 대전환의 시발점이 되었다. 대표 작품으로는 <정물>, <정물화 : 술병과 유리컵, 그리고 항아리>, <벨뷔에서 본 생트 빅투아르 산> 등이 있다.
1853년 네덜란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빈센트 반 고흐는 밀레의 작품에 담긴 사회적 교훈에 큰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며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마음을 기쁨과 위안으로 채워줄 수 있는 소박한 예술을 갈망하였다. 고흐 역시 인상주의와 쇠라의 점묘법의 영향으로 강렬한 표현 속에서도 섬세하고 치밀한 화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원색과 과감한 붓놀림을 즐겼는데 이는 붓자국들이 격앙된 감정의 전달과 색채를 분할하기 위한 것들이다. 또한 정확한 묘사보다는 사물들에 대해 스스로 느꼈던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 표현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나타냈는데 자신의 목적과 일치한다면 사물의 형태를 과장, 변화, 왜곡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흐는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노르웨이의 에드바르트 뭉크와 독일의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를 비롯한 표현주의자들은 고흐의 타들어가는 강렬한 화풍 스타일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대표 작품으로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곡물밭>,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테라스>, <예술가의 방> 등 수많은 작품이 있으나 생전 한 점만 판매되었다.
폴 고갱은 1891년과 1895년 두번 남태평양에 갔다. 그는 날이 갈수록 미술이 겉멋에 빠져 피상적으로 되어가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강렬하고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문명이 빼앗아버렸다는 확신과 염증을 느끼고 소박한 삶을 찾아 타히티섬으로 갔다. 그는 보다 단순하고 보다 솔직한 어떤 것을 열망했고 그것을 원시인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고갱은 야만적이고 강렬한 색채와 소묘만이 순수한 자연의 아이들을 올바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고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또한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채워 넣으며 솔직함과 단순함을 목표로 두었다. 비자연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감정적 그림을 추구하였으나 하지만 그는 유럽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남양 군도로 돌아가 마지막 불운한 여생을 보냈다. 고갱 또한 고흐처럼 뭉크와 독일의 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대표 작품으로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는 르네상스 이래로 인류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제대로 질문을 던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프란시스 쉐퍼는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이며 장로교 목사이자 복음주의 운동가이다. 그의 저서에서 이 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은 고갱이 자살하려고 시도하기 직전에 자신의 마지막 작품<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그 질문의 대한 대답은 "온 곳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갈 곳도 없다는 것이다."로 말하였다.
일본 미술은 인상주의에 영향을 주면서 고흐와 고갱은 깊이감을 경시하고 색채를 경렬하게 표현하였고 쇠라는 점묘법을 피에르 보나르는 캔버스에 아른거리는 빛과 색채의 독특한 감수성을, 페르디난트 호들러는 그의 고향 풍경을 대담하고 단순화하여 포스터와 같은 명료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이 절제된 회화 수단을 포스터라는 새로운 미술에 활용하였다.
오늘날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은 강렬한 정열을 통해서만 예술가는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표현 할 수 있다는 전통적 미술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었던 세명의 화가의 해답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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