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0. 25 ~ 1973. 4. 8.)는 스페인 항구 도시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고 모친 마리아의 성을 계승하였다. 부친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공립 미술 학교 교사이자 화가였다. 14세에 바르셀로나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부친이 근무하는 미술 학교에서 배움을 이어 나갔다. 이 무렵 피카소는 신동으로 이름이 날리기 시작하였다. 15세에는 마드리드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하였으나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여 프라도 미술관을 공부의 연장으로 매일 다니다시피 명화를 감상하였다. 1901년 파리 몽마르트르로 옮겨가 풍속화를 그리던 로트렉과 스텐렌의 작품에 이끌리게 되어 파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4년 동안 피카소는 사회의 패잔 자, 고독한 노인, 뒷거리의 사람들 등 인간상을 화면에 포착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어두운 색채와 섬세한 선으로 대상에 대한 느낌을 짙은 파랑 한가지 색으로 표현하였다. 이 시대의 작품으로 있다. 초기와는 달리 프랑스 화풍에 가까운 그림이 많은 1904년에서 1906년 짧은 기간 동안 피카소는 이른바 '장밋빛 시대(분홍색의 시대)'를 맞게 되는데 당시 파리 몽마르트로 거처를 옮기면서 친구였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사귀게 되면서 시야를 내면에서 외면으로 넓혀 나아갔다. 화면은 밝은 연 분홍색으로 채색되고 단순한 형태로 나타내었고 2년의 기간 동안 피카소는 전과는 달리 붉은색과 분홍색을 많이 사용했다.
피카소는 고흐의 인상주의와 고갱의 원시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아주 단순한 요소들로부터 얼굴이나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평면적이지 않으면서 사물을 단순하게 그림과 동시에 입체감, 깊이감을 유지하는 그림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형태와 공간에 대한 세잔의 방식에서 연구하고 구현, 재현하여 확대, 추구하였다. 세잔은 어느 젊은 화가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연을 구, 원추, 원통의 기본적인 입체의 형태를 염두에 두라고 충고하였는데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구, 원추, 원통으로 사물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기를 포기하면서 세잔처럼 한 소재가 가진 확고하며 변함없는 모습을 포착하여 진정한 목표인 사실을 철저하게 받아들인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다.
피카소의 <바이올린과 포도>는 신체의 눈으로 본 바이올린과 마음의 눈으로 본 바이올린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상스럽게 뒤죽박죽된 형상들이 실제의 바이올린을 더 잘 재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물의 특징적 형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각도에서 그리는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균등한 요소로 구성하여 화면 전체가 일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혼잡하게 보이지 않는데 이러한 일관된 조화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템 기둥과 같은 원시 미술 작품과 특징을 함께 할 수 있다.
피카소가 말하는 입체주의는 역설을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고 새로운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이 역설을 이용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입체주의자들은 색채가 주는 즐거움을 단념하고 형식적인 입체 표현의 전통적인 기법을 나타내었다. 피카소 자신은 그가 실험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며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할 뿐이라고 말했다. 입체파 화가들은 세잔이 손을 놓은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였으며 그 후 미술가들이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형태'에 대한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 '형태'가 우선이고 '주제'가 그다음의 문제였다.
1934년 피카소는 장기간 스페인 모국에 머물렀으나 3년 뒤 1937년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인 게르니카를 폭격하고 학살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즉시 붓을 들어 이에 항의하는 대작을 그렸다. 이것이 그해 193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를 장식한 <게르니카>이다. 큐비즘이 오로지 예술의 범위 내에서만 행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피카소는 로써 평화와 자유를 위협하는 침략자를 향하여 규탄하는 행위를 작품에 옮겨 담은 것이다. 1951년 그는 '한국의 학살'을 발표하였고 사회주의자로서 한국 전쟁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학행위에 대해서 비판하였으며, 유엔과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반대하였다.
이처럼 피카소는 미술 활동을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알렸으며 상식의 파괴로 이어지는 미의 개념을 탈피시켰다.
1973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큐비즘의 개척자 파블로 피카소의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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